리 밴클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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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 밴클리프는 1925년 뉴저지주 서머빌에서 태어난 미국의 배우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배우로 데뷔하여, 1952년 영화 《하이 눈》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스파게티 웨스턴 영화 《석양의 건맨》, 《황야의 무법자》 등에 출연하며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했다. 이후 여러 스파게티 웨스턴과 서부극에 출연하며 전성기를 누렸으며, 영화 《뉴욕 탈출》, TV 시리즈 《마스터》 등에도 출연했다. 1989년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묘비에는 "최고의 악당"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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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초기 생애
리는 1925년 1월 9일 뉴저지주 서머빌에서 마리온 라비니아 반 플릿과 클라렌스 르로이 반 클리프 사이에서 태어났다.[1]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네덜란드계였다. 리는 서머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9월에 미국 해군에 입대했다.[2][3]
군사 훈련을 마친 후, 반 클리프는 구축함에 배치되었고, 이후 USS 인크레더블이라는 기뢰 제거함에서 음파 탐지병으로 근무했다.
리 밴클리프는 1952년 영화 하이 눈으로 스크린에 데뷔했다.[1] 로스앤젤레스에서 연극 ''미스터 로버츠'' 공연 중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에게 발탁되어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으나, 코 성형 요구를 거절하고 총잡이 잭 콜비 역을 맡았다.
3. 군 복무
반 클리프는 처음에 카리브해를 순찰하다가 지중해로 이동하여 남부 프랑스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1945년 1월, ''인크레더블''호는 흑해로 이동하여 소련 해군의 세바스토폴(크리미아) 기지를 중심으로 기뢰 제거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흑해에서 공중-해상 구조 순찰을 수행한 후 시칠리아의 팔레르모로 돌아왔다.
1946년 3월 제대 당시 반 클리프는 음파 탐지병 1등 수병(SO1) 계급에 올랐고, 기뢰 제거함 근무 배지를 받았다. 또한 브론즈 스타 훈장, 미국 굿 컨덕트 메달, 유럽-아프리카-중동 캠페인 메달, 아시아-태평양 캠페인 메달, 미국 캠페인 메달,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을 수여받았다.[4][5]
4. 배우 경력
이후 ''캔자스시티 기밀''(1952), ''비행 중대'' (1953), ''빅 콤보'' (1955), ''황야의 무법자''(1966)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9][10] 특히, ''빅 콤보''에서는 진 월러스, 얼 홀리먼과 함께 출연했다.

1952년 TV 드라마 ''스카이 킹''을 통해 TV 무대에 데뷔한 후, ''킷 카슨의 모험'', ''레인지 라이더'', ''독립 척탄병'', ''애니 오클리'', ''용감한 독수리'', ''챔피언의 모험'', ''웰스 파고의 이야기'', ''리처드 다이아몬드, 사립탐정'' 등 다양한 TV 시리즈에 출연했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척 코너스와 함께 ''라이플맨''에, ''툼스톤 테러토리''에 출연했다. 그 외에도 ''프런티어 닥터'', ''리버보트'', ''수배자'', ''매버릭'', ''진짜 맥코이'', ''준 앨리슨과 함께하는 듀폰 쇼'', ''앤디 그리피스 쇼'', ''터치불스'', ''알래스칸'' 등 여러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15]
''총이 있으면 여행을 한다'', ''콜트 .45'', ''시마론 시티'', ''라라미'', ''시티 디텍티브'', ''주 경찰'', ''코치스 보안관'' 등에도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주석별'', ''OK 목장의 결투'' 등 서부극에서 악역을 연기하기도 했다.[16]
1960년대에는 ''보난자'', ''건스모크'', ''황혼의 지대'', ''리버티 발렌스를 쏜 사나이'', ''페리 메이슨'', ''제이미 맥피터스의 여행'' 등에 출연했다.
1959년에는 음주운전 사고로 무릎 부상을 당해 배우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인테리어 사업과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65년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건맨》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출연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후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에서 '나쁜 놈(The Bad)' 엔젤 아이즈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1980년에는 척 노리스와 함께 《옥타곤》에 출연했고, 1981년에는 존 카펜터 감독의 영화 《뉴욕 탈출》에서 경찰국장 밥 호크 역을 맡았다. 1984년에는 TV 시리즈 《마스터》에서 닌자 사부 역을 맡았으나, 조기 종영되었다.
다음은 리 밴클리프가 출연한 주요 작품들을 정리한 표이다.
4. 1. 초기 (1950년대 ~ 1960년대 초)
해군 제대 후, 반 클리프는 고향으로 돌아와 아마추어 댄스 밴드에서 활동했다.[6] 클린턴(뉴저지주)의 리틀 시어터 그룹에서 공연된 연극 ''우리 읍내''에서 조지 역으로 첫 연기 경험을 쌓았다.[7] 이후 연극 ''천국은 기다린다''에서 권투 선수 조 펜들턴 역을 맡았고, 스카우트되어 뉴욕시의 MCA 기획사 소속 에이전트를 통해 앨빈 극장에서 공연된 ''미스터 로버츠''에 출연하게 되었다.[8]
반 클리프의 스크린 데뷔작은 ''하이 눈''이었다.[1]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스터 로버츠'' 공연 중 영화 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의 눈에 띄어 그의 차기 영화 출연 제의를 받았다. 크레이머는 그에게 하비 펠 부보안관 역을 제안했지만 코 성형을 요구했고, 반 클리프는 이를 거절하고 침묵하는 총잡이 잭 콜비 역을 맡았다. 그는 ''캔자스시티 기밀''(1952), ''비행 중대'' (1953), ''빅 콤보'' (1955) 등에 출연했다.[9][10]
1952년, 서부 항공 시리즈 ''스카이 킹''의 에피소드 "공포의 공식"에 출연하며 텔레비전에 데뷔했다.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어린이 대상 서부 시리즈 ''킷 카슨의 모험''에 6번 출연했다. 신디케이션 서부 시리즈 ''레인지 라이더''에도 3번 출연했다. 1952년에는 텔레비전 시리즈 ''독립 척탄병'' 82화에 출연했다.[11] 1954년에는 신디케이션 시리즈 ''세기의 이야기들''에서 제시 제임스 역을 연기했다.[12]
1955년에는 신디케이션 서부 시리즈 ''애니 오클리''에 두 번 출연했고, CBS 서부 시리즈 ''용감한 독수리''에 게스트 출연했다. 같은 해 ''챔피언의 모험''의 한 에피소드에서 악당을 연기했다. 1957년에는 NBC 서부 시리즈 ''웰스 파고의 이야기''에서 체로키 밥 역을 맡았다.[13] 1958년에는 ''리처드 다이아몬드, 사립탐정''에서 로데오 선수 에드 머독 역을 맡았다.[14]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척 코너스와 함께 ABC의 ''라이플맨'' 네 에피소드에 다양한 캐릭터로 출연했으며(1960년 시즌2 31화 "탕아"에서 스팅거 역), ABC의 ''툼스톤 테러토리''에도 두 번 출연했다. 1958년에는 신디케이션 서부 시리즈 ''프런티어 닥터''의 에피소드 "위대한 역마차 강도 사건"에서 시드 카버 부보안관 역을 맡았다. 1959년에는 NBC 서부 시리즈 ''리버보트''의 에피소드 "이상한 요청"에서 루크 클래그 역을, CBS 서부 시리즈 "수배자"의 에피소드 "인질"에서 점보 케인 역을, 그리고 1961년 ''매버릭''의 에피소드 "레드 독"에 출연했다.
ABC 시트콤 ''진짜 맥코이''의 한 에피소드에서 보초병 역을 맡았다. 1960년 CBS 안토로지 시리즈 ''준 앨리슨과 함께하는 듀폰 쇼''의 에피소드 "두려움에 의한 재판"에서 피파 스콧과 척 코너스와 함께 출연했다. ''앤디 그리피스 쇼''와 ''터치불스''("고용되지 않은 암살자" 편에서 프랭크 다이아몬드 역)에도 출연했고, ABC/워너 브라더스 서부 시리즈 ''알래스칸''에도 출연했다.[15]
반 클리프는 CBS 서부 시리즈 ''총이 있으면 여행을 한다'', ABC/워너 브라더스 시리즈 ''콜트 .45'', NBC 서부 시리즈 ''시마론 시티''와 ''라라미'', 그리고 로드 카메론의 신디케이션 범죄 드라마 ''시티 디텍티브''와 ''주 경찰''에 게스트 출연했다. 존 브롬필드의 신디케이션 범죄 드라마 ''코치스 보안관'' 에피소드에도 출연했다. 그는 ''주석별''과 ''OK 목장의 결투''를 포함한 여러 서부극에서 사소한 악당과 부하 역할을 맡았다.[16]
1960년에는 ''보난자'' 에피소드 "혈통"(1960년 12월 31일)에서 악당 사기꾼으로 출연했고, ''건스모크''에도 출연했다. 1961년에는 ''황혼의 지대'' 시즌 3의 7화("무덤")에서 리 마빈과 함께 출연했다. 그는 1962년 존 포드 감독의 영화 ''리버티 발렌스를 쏜 사나이''에서 존 웨인과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 하에 리 마빈의 주인공 캐릭터의 악당 부하 역을 맡았다. 1963년에는 ''페리 메이슨''("황금 오렌지의 사건" 편)에 출연했고, 같은 해 ''제이미 맥피터스의 여행''의 "부적응자의 날"에 출연했다.
1959년 음주운전으로 인한 자동차 사고로 무릎을 다쳐 의사로부터 서부극에서 다시는 말을 탈 수 없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 사고는 그를 괴롭혔고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밴 클리프는 배우 활동을 반쯤 은퇴하고 아내 조앤과 함께 인테리어 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해양화와 풍경화도 그리기 시작했다.
4. 2. 전성기 (1960년대 중반 ~ 1970년대)
1965년,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건맨》에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함께 출연하며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17] 이 영화에서 그는 더글러스 모티머 역을 맡았다. 이후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영어, 1966)에서 '나쁜 놈(The Bad)' 엔젤 아이즈 역을 맡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레오네 감독의 영화 출연을 통해 반 클리프는 스파게티 웨스턴의 주요 스타가 되었으며, 《석양의 건맨(The Big Gundown)》(1966), 《데스 라이즈 어 호스(Death Rides a Horse)》(1967), 《분노의 날(Day of Anger)》(1967), 《위대한 결투(The Grand Duel)》(1972) 등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는 《사바타(Sabata)》(1969)와 《사바타의 귀환(Return of Sabata)》(1971)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이탈리아-미국 합작 영화 《하드 라이드(Take a Hard Ride)》(1975)에서는 짐 브라운과 공동 주연을 맡았다. 《갓 건(God's Gun)》(1976)과 《키드 벤전스(Kid Vengeance)》(1977)는 그의 마지막 서부극 두 편으로, 리프 가렛과 공동 주연을 맡았으며, 두 영화 모두 주로 이스라엘에서 촬영되었다. 1970년대에는 《바르케로(Barquero)》(1970), 《엘 콘도르(El Condor)》(1970), 《황야의 7인 승리(The Magnificent Seven Ride!)》(1972) 등의 미국 서부극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4. 3. 후기 (1980년대)
1980년대에도 리 밴클리프는 영화와 TV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980년에는 척 노리스와 함께 《옥타곤》에 출연했고, 1981년에는 존 카펜터 감독의 컬트 영화 《뉴욕 탈출》에서 경찰국장 밥 호크 역을 맡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1984년에는 TV 시리즈 《마스터》에서 닌자 사부 역을 맡았으나, 아쉽게도 조기 종영되었다.
5. 개인사
반 클리프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1943년 12월 10일 고등학교 시절 교제했던 패시 루스 칼(Passey Ruth Carl)과 첫 번째 결혼을 하여 아들 앨런, 딸 데보라, 데이비드 3명의 자녀를 두었다.[20] 1960년에 이혼하고, 같은 해 4월 9일에 조앤 드레인(Joan Drane)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21] 1974년에 이혼하고, 2년 후인 1976년 7월 13일에 버바라 하블론(Barbara Havrone)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22] 반 클리프는 1989년 사망할 때까지 버바라 하블론과 함께 했다.
딸을 위한 놀이집을 짓다가 오른손 중지의 마지막 마디를 잃었다. 그 손가락은 영화 ''황야의 무법자''(1966)에 등장한다.[23]
6. 사망
1970년대부터 심장병을 앓았고 1980년대에는 인공심장박동기를 이식받았으나,[24] 반 클리프는 1989년 12월 16일 사망할 때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했다.[25] 그는 캘리포니아주 옥스나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26] 사망의 보조 원인으로는 인후암이 기록되었다.[27]
그는 캘리포니아주 할리우드 힐스의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묘지에 묻혔으며, 묘비에는 악당으로서의 그의 많은 주목할 만한 연기 활동을 가리키는 "최고의 악당(BEST OF THE BAD)"이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28]
7.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
세르조 레오네 영화 속 캐릭터는 《럭키 루크》의 엘리엇 벨트, 《스타워즈》의 캐드 베인 등 다양한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었다. 밴드 프리머스는 앨범에 리 밴클리프에 대한 노래를 수록했다. 《워크래프트》, 《메탈기어 솔리드》 등 게임 캐릭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헝가리 음악가 타마시 체는 "Lee van Cleef"라는 노래를 작곡했다.[23]
8. 출연 작품
리 밴클리프는 1952년 하이 눈에 처음 출연한 이후, 1965년 석양의 건맨에서 더글러스 모티머 대령 역을 맡는 등 여러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36]
- 황야의 분노 - 프랭크 텔비 역
- 이소룡과 쿵후 매니아 (다큐멘터리)
- 최후의 승자
그는 38년 동안 90편의 영화와 109편의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하며 다양한 배역을 소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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